2008년 1월 24일 목요일
구로 CGV 1관
9시 55분 - 11시 38분 1회차
File 01.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에반게리온 신극장판 1부가 상영된 것은 다소간 놀라운 일이었다. 25분 만에 5천 석이 휑하니 날아가 버렸다는 것은, 갈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빡빡한 스케쥴과 당일치기의 압박 탓에 포기했던 나에게는 "허헛, 참..."스러운 일이었고. 에반게리온이라는 단어는 내가 초딩 때 나왔던 말이었다. 내게 에바는 TV 광고와 문방구에서 파는 그림 엽서들로 기억에 남아있다. 그림 엽서 있지 않은가, HOT 같은 연예인들 얼굴 박혀서 팔던 그런 것들... 연예인 사진이 아니었던 것은 내 기억에 에바 밖에 없었던 듯. 그만큼 에바가 당시에 화제였었나? 잘 모르겠다. 여러 종류의 그림 엽서가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 가장 멋있었다고 느껴졌던 건 역시나 정의의 주인공일 것 같아 보이는(!?) 초호기가 그려진 그림 엽서. 아, 레이도 있구나. 초등학교 옆에 있는 문방구에서 물(지금 생각해보면 LCL인듯)에 잠긴 채인 레이의 전신 누드 엽서도 팔았던 주인 아주머니의 배짱도 지금 생각하면 미소가(?) 걸리는 대목이다. 이상이 에반게리온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떠오르는 내 상념들이다.
File 02. 10년 만에 새로 만든다는 에반게리온.('온'의 일본어 글자가 바뀌었다고 한다.) 일종의 시각적 폭력, 혹은 광기의 소용돌이라고 봐도 무방할 에반게리온이(그 정점인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을 보면, 이거 만든 사람이 금방 자살했다고 소식이 들려와도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질 수준이다.) 보다 친절해졌다고 들려와서, 또 참으로 보고 싶었던 터였다. 부산 때 보지 않고난 뒤로 기회가 그닥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CGV가 전국 개봉을 자처하고 나서서,(CGV가 다소간 한국 주류와 어긋나는 것들로 단독개봉을 해서 재미를 짭잘히 보고 나서 이런 쪽을 미는 듯하다.) 덕분에 이렇게 큰 상영관에서 보게되었다.
보고나서 드는 생각은, '아, 제법 멋지게 만들었잖아.' 90분이라는 상영시간 동안 등장인물들은 에바의 등장과 사도의 등장, 신지의 버벅과 레이와의 감동의 이벤트까지 이르는 사건들을 열심히, 그리고 부지런히 꾸려나간다. 허겁지겁 달리느라 정신이 없는 산만함도 다소간 느껴지는 전반부에 실망감이 조금 들긴 하지만, 샴시엘 격파 이후의 전개는 잘 다듬어지고 진행되었다고 생각한다. (야시마 작전 준비의 장황한 오퍼레이팅을 보고 있자면 한숨도 나오는 건 사실이다만.) 막판에 보여지는 충격적 영상들은 앞으로의 전개가 기존판과 판이하게 달라질 것임을 암시하기는 하지만, '서' 자체는 큰 골자에서 어긋나지 않고 그대로 따르는 모습을 보인다.
헌데 요리 방식이 완전히 달라지니 이거 또 색다른 면모를 보인다. 감자 피자 대신 고구마 피자로 바뀐 느낌. 많은 사람들이 열혈 신지라고 부르는 그 표정들과 태도는 나로서도 '어머나, 다시 한 번 말해봐'라는 심정이었다. 이 리메이크 버전(이라고 쓰고 대공사라고 읽는다) 에반게리온으로 처음 에반게리온에 발을 들이는 사람으로서는 원판의 신지의 정신이 얼마나 일그러지고 뒤틀려 있는지 감조차 잡기가 힘들 것이다. 미사토는 아들을 뭣으로 다루는 겐도에게 정면으로 대들며, 싸움에 나가는 신지에게 토우지가 격려의 전화를 보내온다. 정신 붕괴로 인간 멸절까지 기도했던 이전 극장판의 신지와는 다르게, 이번 극장판의 신지는 타인의 힘을 받고 타인에게 손을 건낸다. 아직 극초반이기야 하지만, 앞으로의 전개에 큰 희망이 보기도 하는 대목. 어쩌면 이것도 다 에반게리온에서 이런 게 나온다는 점에서 신기하고 대단해 보이는 건지도 모른다. 이게 아예 오리지널 작품이었다면 큰 평가를 받을 수 있을런지도 살짝 의문. 작품 자체의 뭔가 아쉬운 느낌을 확실하게 보상해주는 것은 가이낙스답다는 탄식이 들 정도로 장인 정신이 묻어나오는 화려무쌍하고 압도적인 비주얼이다. 설명과 설득력이 부실하고 장황하단 판단이 들 수 있을 일반 관객들의 불만을 달래주기에도 충분하다 못해 넘칠 수준.
File 03. 모르긴 모르지만, 엔딩 크레딧 후 예고편에서 튀어나오는 신 캐릭터와 새로운 설정들... 짐작인데, 에바 5호기를 그 새 캐릭터인 안경소녀가 타고, 달에서 온다는 6호기는 카오루가 탄 채로 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뭐, 올해 12월 말에 '파'가 개봉한다고 하는 것 같으니, 그 때 확실해지겠지.
여담 : 애들은 제발 데리고 오지 말아달라. 애들한테 트라우마 생기겠다, 진짜로. 부드러워졌다고는 하지만 기괴한 정서는 남아있기에.
여담2 : 구로를 선택한 이유는 모든 에반게리온 상영관 중 제일 큰 규모를 자랑했기 때문이었다. 나 참, 에반게리온을 멀티플렉스 1관에서 보다니. 300석 규모의 커다란 상영관에서 보는 전투씬은 전율을 다 안겨주더라. 물론 1관에 걸리는 건 개봉일 하루만이었지만 말이다. ㅎㅎ
여담3 : 러닝 타임을 10분이나 20분은 더 끌어 올렸어야 했다. 이건 확장판 개념의 이전 극장판들도 아니고 TV 시리즈와 마찬가지인 별개의 연속극 시리즈라고 볼 수 있는데, 바람 구멍이 좀 많은 데다 단편으로서 완결성이 강하지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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